닉네임. 별명이란 뜻이지만 인터넷 문화가 익숙한 이 시대의 일반적 사람들에게 그것은 '아이디'의 또 다른 명사형이다. 내가 처음 닉네임을 만들어야겠다고, 혹은 만들어야만 한다고 강요당한 건 2400bps 모뎀을 쓰던 하이텔 시절의 일.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때 내 아이디는 Jasmene이었다.
이후 인터넷 시대가 열리고 여러가지 홈페이지에 가입을 하게 된 후부터는 여러가지 아이디가 생겼다. 이유는 개인적으로 바꾸고 싶어서일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내 아이디를 타인에게 '선점 당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터넷 문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일수록 내 아이디를 다른 사람이 쓰게 될 확률은 점점 올라갔고, 덕분에 이젠 내 아이디 갯수를 세려면 다섯 손가락으론 부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가진 그저 수많은 '아이디'들 중에서 하나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물론 의미가 없진 않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그걸 기억하고 있지도 못할테니까. 그래서 왠지 나는 아이디와 닉네임을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닉네임은 뭔가, 그들 중에서도 좀 더 특별하다. 그것은 원래 내가 가지고 싶었던 단 한가지의 이름이다. 혹은 누군가가 먼저 선점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쟁취했을 인터넷 공간 상의 내 아이덴티티다.
다행스럽게도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같은 의미든 다른 의미든 결과적으론 닉네임과 아이디를 구별하고 싶었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비록 아이디는 다른 것을 사용할 지라도, 닉네임을 구분지어 표기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 너무나 일반적이 된 것을 보면 말이다. 덕분에 대개의 경우 언제나 나의 닉네임은 '마리'일 수 있었다. 물론 닉네임조차도 선점 당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곤 했지만.
'마리'는 내 또다른 이름이다.
나는 이것을 인터넷 상의 닉네임으로도 쓰지만 실제 영어 이름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내 최초의 개인 홈페이지였던 '아벨로네의 노래' 시절, 나는 이 닉네임의 유래에 대해서 밝힌 적이 있다. 물론 이 글을 읽으실만한 분들 중에 아벨로네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혹은 방문했었던 사람은 한두 명 정도 밖에 안될 테지만.
솔직하게 밝히자면 이 포스팅은,
1. 어제 책장 구석에 있던 일부 만화책 정리를 하다가 박희정님의 Martin&John 1권을 다시 보게 되었다.
2. 오늘 빨래를 널면서 아벨로네의 노래 시절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3. 마리라는 닉네임을 어떻게 쓰게 되었더라?
4. 어제 읽은 박희정님의 책과 그녀가 떠오르고
5. 그와 관련한 여러가지 생각과 상념들 속을 허우적 대다가
6. 빨래를 다 널고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 버튼을 누르게 된 것
으로 시작됐다(...)
세상엔 수 없이 많은 마리가 있다.

이런 마리

저런 마리

요런 마리까지.
하지만 내 닉네임의 모티브가 되신 분은 바로
하지만 내 닉네임의 모티브가 되신 분은 바로

가운데 계신 이 분이시다.
(이 분과 관련한 일러스트가 전무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직찍. ㅋ)
(이 분과 관련한 일러스트가 전무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직찍. ㅋ)
- 아래 내용부턴 관련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
박희정님의 Martin & Jhon 1권 첫번째 편의 등장인물.
"그런 얘기 알아? 발톱이 빨리 자라면 슬픔이 많은 거라는... 그 말을 믿고 슬픔을 영원히 병 안에 가두고 있다는 그런 여자를 만났어." - Jhon
그녀는 마틴이라는 게이 연인을 가진 존이라는 남자와 결혼한 인물.
이 단편의 주인공은 마틴과 존이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지 않은가?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내가 처음 이 만화를 읽은 순간에 나는 마틴도 존도 아닌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단 번에 그녀의 이름을 내 또 다른 이름으로 결정했을 정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너무 간단하다. 나는 그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쓰러져 울며 지내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 - Mari
게이 연인을 가진, 그 연인을 너무 사랑해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에이즈에 걸린 남자.
그런 남자를 선택해서 그의 죽음을 지켜 본 여자.
그리고 떠나간 연인의 반려자를 연인의 죽음 후에 대면한 또 다른 남자.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ㄱ-
무척 비현실적인 상황을 설정해놓고 그들이 얘기하는 건 치장되지 않은 아주 지독한 현실.
"세상 남자랑 다 자야 해도 너랑은 안자... 사랑하니까." - Jhon
기본적으로 박희정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너무나 리얼하게 무진장 감각적으로 풀어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가슴이 아프다.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 감추어 놓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감정적 치부를 툭 하고,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는 느낌이다.
적어도 내가 고등학생 때 만났던 마리는, 무척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주 쿨하고 어른스럽고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그녀는 진짜 어른이었다.
근데 어제 몇년 만에 다시 만난 마리는 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슬퍼도 제대로 슬퍼할 수 없는,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없는 애정에 손 내밀지도 못하고 바라만 봐야했던 그런 불쌍한 여자였다.
십 년 만에 나는 드디어 그녀를 제대로 마주보고 새삼 많은 걸 느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건 아니다. 내가 어린 시절 생각했던 어른은 자기 감정을 잘 컨트롤 할 수 있고 절제력 있고 책임감 있는, 모든 것에 익숙하고 여유로운 그런 사람. 겉으로 보여지는 많은 부분들이 다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나도 '어른'이 되고 나서 깨달은 것이다. 박희정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마리'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는 걸, 상처입을 수 있고 때론 실수할 수 있고 슬픈 땐 울고 싶지만 그 모든 부분을 어쩔 수 없이 감출 줄도 알아야 하는 나와 같은 어른이라는 걸 드디어 알았다.
그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선택한 닉네임.
이제는 그냥 마리가 아니면 어색할 정도로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이름이 되었지만 그 바탕에는 그런 의미가 존재했다는 걸 오랜만에 새삼 깨닫고 웃어본다. 어른에 대한 동경과 현실 사이의 갭을 여실히 체험하는 지금 이 순간, 그녀도 결국 나와 같은 어른이었다는 것에 한 편으론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 어른, 그거 사실 별 것도 아니더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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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른, 그거 사실 별 것도 아니더라. ㅋ
... 에서 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