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프로그래머

 둥이오빠 | 따이어리, 두번째 | 2010/01/25 12:5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처음으로 프로그래밍을 해 본 것은 1985년,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었다. 다니던 피아노 학원 옆에 컴퓨터 학원이 생겼고, 나는 막무가내로 컴퓨터 학원을 다니겠다고 했다. 스프레드 시트는 커녕 제대로 된 워드 프로세서도 없는 환경에서, 컴퓨터를 배운다는 것은 프로그래밍을 배운다는 것이었다. ABC도 모르는 초등학교 5학년 꼬마는 PRINT 문을 피, 알, 아이, 엔, 티 라 읽으며 첫 프로그램을 짰다.

중학교 때는 처음으로 게임을 만들었다. 매번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과격을 화살로 쏘아 맞추는 단순한 게임. 하지만 시작 화면부터 엔딩까지 갖춰진 제대로 된 하나의 게임이었다. 어드벤쳐 게임을 만들려고 설계도는 많이 만들었지만, 한번도 끝까지 완성한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전산반을 들어갔고, J군과 친구가 되었다. 세상엔 C언어라는 언어도 있다는 것을 배웠고, OS와 컴파일러가 분리된 개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축제인 전산제에 무언가 프로그램을 만들어 출품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전산과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니던 대학을 3학년에 때려치우고 늦게나마 전산과를 선택했다. 늦깎이 학생이 그렇듯 나는 참 열심히 학부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아름답지는 않다. 고통스러운 공부와 리포트와 시험의 연속으로 나의 대학 생활을 기억한다. 컴퓨터 사이언스가 학문으로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대학원에 간 후였다. 소프트웨어를 코드 덩어리로 보지 않고 아키텍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배웠고, (배웠다기 보다는 그럴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끌려 들어간 것이었지만) 낮은 학생으로, 밤은 회사원으로 살았다. 내 논문 내용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컴퓨터 실험실에서 한달을 밤을 새웠다. 실험에 PC가 32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 때 더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세상 일이 예측대로 되는 적이 별로 없다.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회사에 들어가 연구원 일을 3년 했다. 지금 일하고 있는 프로그래머 동료들에게 말하면 웃어 넘기겠지만, 국내 유수 대기업 연구소에서 나는 프로그래머로 제법 인정 받으며 살았다. 인생에 드라마틱한 반전이 한번 더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아직도 그 회사에서 과장 5년차의 중견 엔지니어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제 저녁, 내 책꽂이에 빼곡히 꽂혀 있는 컴퓨터 사이언스 관련 책들을 보다가, 이제는 정말 저 책들을 다시 꺼내 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저 책들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것은 미련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자랑거리, 혹은 추억거리, 그 이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기획자, 혹은 크리에이터로서의 업무에 프로그래머로서의 경력이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안되긴 커녕 그게 내가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경쟁력인 것 같다. 하얀 로냐프강의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권위보다 한 열배쯤... ㄱ-;; 하지만 더 이상 프로그래머로서 성장도, 고민도, 연구도 하지 않고 있는 내가 지금도 프로그래머라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내 경력과 그 학문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 사이언스는 내가 기획자의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이미 아이덴티티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 그 책장을 비운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책장을 비우고, 이제 그 자리는 나의 현재와 나의 미래, 더 앞으로 나가기위한 지식과 계획을 위한 자리로 채울 것이다.

1985년부터 25년.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내 취미이자 직업이자 특기였던 것을, 이제 내 직업의 이름에서 빼려고 한다. 게임 기획자, 시나리오 라이터, 시스템 프로그래머, 소설가. 나는 내 명함에 직업을 이렇게 써왔고, 앞으로는 그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프로그래머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막상 그 책들을 모두 가져다 버리려면 온갖 상념이 한번 더 스치겠지만, 쿨하게 이별하는거다.




굿바이 프로그래머.
잘 가라. 너로 살아가던 시절에도 나는 행복했다.




2010/01/25 12:51 2010/01/25 12:51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랑이 2010/01/25 17:1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참 묘한 느낌이네요.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상균은 하이텔에 하얀 로냐프 강을 연재중이던 예비작가였고, 이제 막 제대해서 복학한 전산학도였는데 말이죠. 그때는 시나리오 라이터도 게임 기획자도 아니였었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가 봐온 이상균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프로그래머로서의 모습이였는데, 이젠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네요.
    확실한 건 오빠를 지켜봐 온 지난 13년동안 그 어떤 모습이었을 때도 멋있고 존경스러웠다는 거예요. 새삼 울 자갸가 참 재주 많은 사람이란 걸 상기하게 되네요. ^^

  2. 나무 2010/01/26 23:4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프로그래머가 아닌 상균옵이라니 기분이 삼삼...'ㅅ';;

[로그인][오픈아이디란?]